지는 해 등이나 떠미는 저 키 작은 달을 보라 이제부터는 달그림자만 길어지는 시간이다 건조한 어른들은 그때부터 더욱 분주하게 움직인다 긴 그림자들을 깎고 매끄럽게 다듬어 세워 놓는다 완성되는 건 지구 멸망 한 시간 전의 고해실이다 이곳에서 그들이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는 건 유행이 다 지났다 두 손에 온기를 담았기로서니 누가 ...
사랑을 기록하는 어리석은 습관을 들이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그러니까 부재중 전화를 남길 때마다 읽어나 보게 어딘가의 새벽을 찢어 누운 우리는 당연하게 서로를 헤집었고 아니다 네가 나를 헤아렸고 나는 그게 다정인 줄 알았어 미안하고 미안하지 않은 건데 늘 그게 궁금했어 왜 어떤 사람들은 서로의 숨결에 질식하고 부식할까 우리 둘만 하던 일을 두고 왜 어떤 사람들...
당신을 만난 계절은 반납일을 잊은 연체 도서와 비슷합니다. 유난히 따뜻하고 유난히 불안합니다. 전하고 싶은 말들은 매일 한 통 적어 보낼 예정입니다만 반투명 책갈피 따위를 끼워 보낼 용기는 실컷 달여 흙빛입니다. 도무지 끓는 물에서 꺼내지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매캐한 연기가 불씨의 작은 손을 붙잡고 춤을 추려 합니다. 당신과 타오르는 방 안에서 느릿한...
- 1 - 선생님, 저는 오래 산 바다에 왔습니다. 몸을 타고 도는 혈액을 닮은 파도는 끈덕지고 멍울지고 시리도록 눈이 부십니다. 주변은 거꾸로 단 꽃다발로 꾸며 놓았습니다. 이곳의 해수면은 우리가 남에게 내밀어 보이는 다정한 수벽의 일종일까요? 아니면 악몽 같이 하얗고도 억척스러운 손아귀의 한 종류인가요? 앞서 걷던 사람이 남긴 걸음들이 짙은 색으로 끌려...
어느 일요일 오후 즈음에는 죽기로 했다 아침엔 따분해서 새벽엔 외로워서 어제는 지나치게 느긋했으나 내일은 바람이 부는 길목마다 바쁠 테고 지난 주는 언니의 세 번째 결혼이었고 다음 주까지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준비물 하나, 병든 몸. 밍밍하고 상투적인 눈물에 이틀 전부터 불려 놓을 것. 쪼글쪼글한 나이테가 물결처럼 흘러 내리더라도 놀라지 말 것. 이...
에둘러 짧고 길고 먼 걸음을 하셨음을 어떻게 만나졌는지와 어떻게 돌아왔는지를 여긴 모래를 밟아도 발자국이 폭하니 솟아 발치를 찌릅니다 그 대신 딱딱하게 언 파도가 일면 우리가 일어나기도 하고 걸어온 자라면 색 벗고 초라해진 거품을 대신해 터지기도 하고 그래, 그리고 나서는요? 거품도 우리가 톡톡 깨지고 나면 그제사 눈물을 흘린답니까? 파리 알을 다진 고기로...
네가 나보다 3일 먼저 죽어 버려서 할 일이 많아 그제는 맑았고 어제는 거실에 무지개를 엎질렀고 오늘은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질 전망입니다 닦기 귀찮아서 네가 입었던 옷으로 덮어 놨어 소매끼리 묶어서 길게 만들었던 옷 일단은 미뤘던 빨래부터 처리해야지 새벽부터 틀어 놓은 영화에선 오늘 비가 온대 3일 전은 7월 13일 7월 13일은 나이스 데이 3개월 정도...
여기 울지 못해 슬픈 문자로 쓰인 책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은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입니다.울지 못해 슬픈 문자를 훔쳐다가 책을 쓰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글만 남겠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슬퍼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연인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문장의 끝에는 마침표가 동그랗게 누워 있습니다. 연인의 잘려 나간 머리처럼 단순했습니다. 그가 지은 시를 한 ...
첫 번째 땅에서, 우리 그때 언제 그랬었지 새 한 마리 살 수 있게 되면 편지 하라고 태어나기 전부터 삐걱대던 그네랑 다 무너진 미끄럼틀이랑 손바닥만 한 시소 하나 덜렁 있던 놀이터 기억나지 103동이랑 204동 사이에 있던 거 평생 이사 같은 건 갈 일 없으니까 거기 벤치 밑에다 묻어 놓고 나중에 꺼내 보기로 했잖아 의자마다 우리 이름만 빽빽하게 적어 놨...
탁자 위에 켜 놓은 초가 말하기를투박한 껍질을 걸쳤다가 말았다가 한다고더위 먹은 물고기들이 수벽에서 헤엄치면애매한 어항을 씌웠다가 말았다가 한다고전채는 수치감을 채로 썰어 버무린 것으로수프는 일생이 눌어붙도록 장시간 끓이고생선은 3시간 전 잡아 올린 실어가 좋겠고고기는 푹 찌르면 과오가 흐르도록 구워서다만 후식을 삼킬 목구멍이 없는 관계로이 정도만 부탁드립...
오직 두 사람만 사는 행성이 있다 그곳에는 웃음 소리가 밀물로 쓰여 있다 밟아도 꺼지지 않는 구름이 폭 피어나는 들판과 바다꽃이 어깨를 부딪는 곳에는 꼭 들러야 한다 오직 두 사람만 사는 행성이 있다 나는 그 행성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곳의 지도를 그리느라 25평 되는 바닥을 다 썼다 당신이 이 별의 이름을 정확히 망각하는 날이 오기 전에 세모나게 네모...
지난 일요일에는 고장 난 물건들을 내놓았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년은 만만하게 버틸 법한 얼룩을 알고서도 기꺼이 시간을 지불하는 이들이 있다 어쩌다 생긴 자국인가 물어 오는 말에는 마를 줄 모르는 어깨만 들먹인다 죽은 선율을 노래하는 스피커가 하나 손에 쥐면 바로 서지 못하는 우산이 둘 결코 매듭 지을 수 없는 목도리가 셋 함께 만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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