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 하루의 반절은 낮잠을 자고. 나머지 반절은 누워서 명상을 하고. (자는 거 아냐!) 가끔 몸을 일으켜서 스트레칭도 쭈~욱 한 번 해. 총총총 걸어다니면서 커다란 창밖을 구경하거나. 졸고 있는 동생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치거나. 재밌는 일들이 가득해. 너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음~ 매일 매일 나가야 하는 거지? 안 갈 수는 없는 거지? 완...
군것질거리를 사러 가면 넌 언제나 풍선껌 하나를 손에 들었다. 밥 먹을 때만 제외하면 평소에도 늘 껌을 달고 살았지. 풍선을 불었다가, 터뜨렸다가. 네 말 마디마디에는 늘 경쾌한 파열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끔은 그 소리에 내 말이 아무 의미도 없이 묻히는 때가 있어도 괜찮았다. 어떤 때는 가만히 눈을 감고 네가 껌을 씹는 시간을 품었다. 늦은 밤이면 우리...
당신은, 정해진 등교 시간보다 이르게 학교에 도착한다. 복도는 텅 비어있다. 사물함의 문을 여는 끼이익하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다. 반사적으로 문을 닫는다. 다시 천천히 열어 보면, 그 안에는 죽은 쥐가 놓여 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다. 헛구역질이나 하며 가방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 든...
선생님! 선생님은 벽장 속에 사는 괴물 이야기를 아세요? 아니면 침대 밑에 사는 괴물은요? 계단 아래 몸을 숨긴 채 숨어 지내는 괴물은? 저는요, 그 괴물들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요. 그 괴물들도 뭔가 무서운 걸 피하느라 그런 곳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요? 저희 아빠는 그런 괴물들이 저를 잡아갈 수도 있어서 꼭 저와 함...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아, 반가워요. 오늘은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하고 이걸 다 접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당신이 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정원이요? 이거 들켜 버렸네요. 맞아요, 정원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아이들이 좋아하거든요. 특히 가장 자랑할 만한 건 타이어 그네를 달아 놓은 오렌지 나무예요....
1, 열 여덟. 그때 난 고작 열 여덟이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파악할 수 있더라도, 그 상황을 타파할 줄은 몰랐을 나이. 어디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기 어려웠던 나는 부모님께 처음 겪게 된 일에 대해 함구하기로 했다. 두 번째 일은 그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아 생겨났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동유럽을 여행 중이셨고, 그들의 여행을...
오늘도 저희 극장에 찾아 주신 모든 관객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본 팸플릿은 여러분의 쾌적한 영화 감상을 위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기술한 것으로, 매표소에서 배부하고 있습니다. 상영이 시작되기 전 팸플릿을 분실하셨을 경우에는 근처의 직원에게 이 사실을 속히 알리시어, 본 문서를 반드시 지참한 채 상영관에 입실하시기 바랍니다. 1. 저희 극장의 ...
그러니 존경해마지않는 경관님, 노을을 눈에 담지 마십시오. 1. 남자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최근 들어 이렇게 깊게 잔 적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남자의 눈밑은 어두웠고, 눈알은 안개가 낀 물 위처럼 희멀건 색이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가게 안.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곤 자신 뿐이었다. 2. 14시간에 달...
1. 내 가장 오랜 친구이자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함께한 너는 그칠 듯 말 듯한 가랑비를 닮았다 옷자락이 젖어 드는 줄도 모르고 줄곧 곁에 두었다 우산을 펼 만큼 세차게 내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살갗에 닿으면 털끝부터 곤두서게 만들 줄은 알더라 어떻게 하면 막을지 알 수 없어 그대로 내리게 두었다 옷감의 색이 진하게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금방 마...
세상에서 빛이 사라진 건지 사람들의 눈이 멀어 버린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일부는 적응하기로 했고, 일부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뒤집어진 세상을 수용하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이런 소식들은 소리로만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시각적으로 새로운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옆집에 살던 정호 씨...
봄이 오면 유난히 눈물이 많아졌다. 꽃을 사랑해마지않으면서도 그 말의 뾰족한 모서리들에 아파했다. 내가 겪은 대다수의 이별은 매년 봄마다 다시 피어났기에 왜 우느냐 묻는 이들에게 둘러대기가 편했다. 어떤 사람들 앞에서 나는 지독한 꽃가루 알러지 환자였다. 1년 내내 하루도 빠짐 없이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던 나의 연인도 이듬해 봄이 찾아올 적에 떠나갈 것을 ...
수신인: BriannaQuinnnz@g_mail.com 발신인: Lenawubsyouu@g_mail.com 브리아나? 나야, 셀리나. 메시지에 답장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뭔 일 있는... 아 잠시만 오늘 목요일이구나? 션이랑 데이트 하고 있겠네! 이따가 확인하면 걔한테도 안부 전해줘. 아무튼, 나 이제 짐 대충 풀고 쉬고 있어. 근데 방 정리하다가 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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